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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정식의 "사랑의 시, 이별의 노래"-우리의 소원은 통일①
작성자 이****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21-02-23 12: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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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1 제공](서울=뉴스1) 이정식= ◆의 원래 제목은 이었다. 2011일 10일 14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는 이란 타이틀로 ‘우리 가곡의 밤’ 무대가 펼쳐졌다.해마다 가을이면 많은 가곡 관련 행사가 열린다. 한국예술콘텐츠교육원 주최로 열린 이날 음악회도 가곡을 주제로 한 여느 음악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명가곡과 신작가곡을 남녀 성악가들이 번갈아 나와 불렀다. 중간에 남녀 이중창이 있었고, 맨 마지막 두곡은 혼성합창단의 순서였다. 합창곡은 작곡가 이안삼 선생이 지휘를 하였다.앵콜곡도 준비되어 있었다. 앵콜곡은 우리 가곡이 아니라 <10월의 어느 암보험비교멋진 날에>였다. 유럽의 연주그룹 시크릿 가든의 리더이자 건반연주자인 롤프 러블랜드가 작곡한 연주곡에 작사가 한경혜씨가 아름다운 우리말 가사를 붙여서 유명해진 노래다. 관객들도 같이 불렀다.또다시 앵콜을 요청하는 박수가 터졌다.이안삼 선생이 객석을 향해 말했다.“준비는 못했지만 (앵콜곡을 더) 할 수는 있습니다. 의 작곡자가 와 계십니다만---. 우리 가락에는 가곡과 예술가곡이 있고, 애창곡과 명곡이 있고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국민가곡이 있는데, 은 국민가곡입니다. 을 부르겠습니다.” 앵콜 요청이 이어지면서 이안삼 선생이 그 자리에 와 계신 안병원(1926- ) 선생을 순간적으로 수원한의원떠올린 것 같았다.◆의 작곡가 안병원 작곡가이면서 이날 합창 지휘를 한 이안삼 선생은 앵콜곡으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부르기에 앞서 합창단 속에 섞여 함께 노래를 부르던 작곡가 진규영 영남대 교수,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이날 무대에서 을 혼신의 힘을 다해 불러 큰 박수를 받았던 김성길 교수, 의 작사·작곡가 김효근 교수 등을 소개했다. 이어 객석 맨 앞줄에 앉아있던 작곡가 임긍수 선생을 소개한 후 “이 자리에 을 작곡하신 분이 와 계십니다. 올해 85세이신데 캐나다에서 부인과 함께 오셨습니다”라며 안병원 선생을 마지막으로 sk정수기소개했었다. 안병원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면서 “저기 (무대 위에 있는) 김성길 교수는 내가 경복중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의 제자”라고 큰 소리로 자랑스럽게 말했다.마침내 반주자가 피아노로 음을 맞추고 곧바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모두가 부산출장안마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지휘자, 출연진, 작곡가, 합창단, 관객이 혼연일체가 되었다. 노래가 시작된 직후 지휘하던 이안삼 선생이 객석에 앉아있던 안병원 선생을 향해 무대로 올라오시라는 손짓을 했다.앞쪽 줄에 앉아 있던 안 선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무대를 향해 갔다. 이안삼 선생이 급히 무대 아래로 내려와 안 선생을 부축해 함께 무대로 올랐다.안병원 선생은 무대 위로 올라서자마자 합창단을 향해 서서 힘차게 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이어 객석을 향해 돌아서 모두 일어서라는 손짓을 했다. 관객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계속했다. 지휘를 하는 안 선생은 감격어린 표정이었다. 모든 이들이 작곡가의 직접 지휘로 을 함께 부르는 암보험비교사이트감동을 맛보았다.노래가 끝나고 긴 박수가 이어졌다. 이날 음악회는 그렇게 뭉클한 여운을 남기며 끝났다.◆부자(父子) 합작품흔히 이 노래의 제목을 이라고 알고 있으나, 지금의 실제 제목은 이다. 그리고 처음 노래가 만들어졌을 때의 제목은 이었다. 원래의 가사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으로 시작 됐었다. 독립을 주제로 한 노래였는데 통일을 염원하는 내용으로 가사가 바뀌어 수십년간 통일을 주제로 한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다. 이 노래는 당초 방송국에서 삼일절 기념 어린이 노래극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해방 2년 후인 1947년, 당시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에서 삼일절을 신촌맛집기념하여 어린이 프로그램에 방송할 특집 노래극을 기획했다. 프로그램 담당은 안병원의 친구 배준호였다. 1947년 1월 어느날 배준호는 안병원을 찾아와 노래극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밝히고 그것을 구체화할 방안에 대한 안병원의 의견을 구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당시 방송국 사정으로는 작가들에게 원고료, 작사료, 작곡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반주 역시 피아노 밖에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의논 끝에 안병원은 당시 이름있는 문인이며 영화감독이자 신문에 삽화를 그리는 화가였던 부친(안석주, 1901-1950)께 무료로 노래극의 대본을 써주십사 하고 간청했다. 그래서 이라는 25분짜리 노래극 대본이 나왔다. 5개의 삽입곡이 만들어졌는데 그 가운데 주제곡이 이었다. 작곡은 안병원이 맡기로 강남왁싱했다. 서울대 음대 성악과 학생이었던 안병원은 작곡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는 1주일 이상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부친이 써준 박스폰가사에 곡을 붙였다. 은 부자합작품이었던 것이다.그렇게 만들어진 이 노래는 이해 2월 28일 종로YMCA에서 열린 “삼일운동 기념 아동 음악회”에서 안병원이 해방 후 조직한 어린이 폰테크합창단에 의해 처음 불렸으며, 이튿날인 3월 1일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송되었다.그 뒤 1948년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분단이 고착화 되자 원두커피도매민족의 염원은 이제 통일이 되었다.이 노래의 ‘독립’을 ‘통일’로 바꾼 것은 당시 문교부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제목도 이 되었다.1950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교과서에 실릴만큼 곡이 좋았고 ‘독립’을 ‘통일’로 바꿔도 가사의 흐름에 전혀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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